영화 리뷰

[헤어질 결심][리뷰] 헤어질 결심 - 산과 바다, 녹색과 청색

위드무비 2022. 10. 27. 14:38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줄곧 치밀하고 특유의 우아함이 있었습니다.

다만 폭력적 묘사와 변태력 덕분에 그 부분이 평가절하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죠.


 


이번 '헤어질 결심'은 그런 박 감독의 장점이 극대화 된 작품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극의 전체구조를 단단하게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짜맞춰갑니다.

그렇기에 느와르 느낌이 묻은 탐정극이란 형식은 더할나위 없이 어울립니다.


영화는 구조적이고 형식적인 구성을 통해 설정된 구도를 끊임없이 확인시키고 암시하며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야'라는 단서들을 던져주고 있기도 합니다.


 


 


 


1. 산 그리고 바다


 


주인공인 서래와 해준 두 인물을 묘사한 포스터를 보면

각자의 배경이 서래는 바다, 해준은 산 입니다.



작중, 남편 기도수가 산에 데려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며 서래는 논어를 인용하는데요

지자요수 인자요산 (知者樂水仁者樂山)

지혜로운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흐르며 수시로 변하고 또한 지혜로운 서래는 바다이며

자신의 심지가 굳건하여 단단히 서있는 어진 인간 해준은 산과 같습니다.



다만 이 문구를 인용하며 자신은 바다가 좋다는 서래에게 해준은 '나도'라는 말을 남기죠.

그 순간 산과 같은 해준은 서래라는 바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남편 기도수가 전반, 두번째 남편 임호신이 후반의 피해자이죠

또한 해준은 전반부에선 해준이 범인이 아님을 후반에선 그녀가 범인임을 밝히려 듭니다.

그리고 감독은 이 파트들에 대립항을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이들의 죽음이 벌어지는 장소는 각각 산(비름봉)과 바다(가 보이는펜션)입니다.

지역적으로는 부산(釜山)과 이포(아마도 異浦?)로 산과 바다란 의미가 됩니다.

전반은 '산'인 해일이 서래를 관찰하며 1인칭에 가까운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후반엔 '바다'인 서래가 해일을 관찰하며 그녀의 주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전반은 산이 붕괴하며, 후반은 바다로 돌아가며 끝이나지요.


 


다만 두 사람의 관계가 짙어지는 순간에는 명확하게 공존하는 순간이 전후반에 들어가는데요

전반주 사건이 해결되고 첫 데이트를 하는 곳은 '산' 속의 절이지만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후반부 진범이 잡혔으나 그 배후의 실상을 해일이 알아낸 직후 서래가 조부와 모친의 유골을

뿌리기 위해 해준은 데려간 '호미산'에는 다른 곳엔 내리지 않던 '눈'이 내리고 있지요.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짧은 순간은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공간처럼 여겨집니다. 


 


 


산과 바다에 해준과 서래를 연결시키고 있으나 앞서 해준이 '나도'라는 대사를 건넨 것처럼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고 있기에 그런 부분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해준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서래를 만남으로서 간만의 숙면을 취하죠

'해'준이고 '해군'이며 스스로 '바다의 사나이'라며 '부산'에서 근무하는 서울남자에게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서래가 사용한 방법은 '미해군'이 개발했다는 호흡법이며 

이때에 서래가 최면을 걸듯 읊조리는 대사는 해준이 해파리가 되어 바닷속을 유영하도록 이끕니다.


 


반면 바다인 서래는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가 물려주었으나 빼앗긴 '호미산'을 언급하며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어머니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전반부 탕웨이의 집 벽지는 산봉우리를 형상화한 듯한 디자인입니다.

물론 산을 좋아하는 기도수의 취향에 의한 선택이겠으나 디자인은 묘하게 파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서래는 외할아버지가 남긴 '산해(山海)경'을 번역하여 노트에 필사하는데 이 '녹색' 노트의 겉표지는

벽지와 같은 모양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청색과 녹색 그리고 적색


 


영화는 세트, 로케, 색보정을 통해 일정한 색을 배경으로 구현하는데 바로

초록과 파랑, 그리고 붉은색입니다.


 


초록은 산, 파랑은 바다를 의미하며 두 인물이 뒤섞이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숨어있던 붉은색은 이 세계가 충돌하고 흔들리는 순간에 고개를 쳐듭니다.


 


 


후반부 서래를 의심하며 수사를 벌이는 해준이 처음 집착한 서래의 '청록색' 원피스처럼

전반부 서래의 옷차림에도 이 색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처음 심문을 받을 때 서래의 옷은 파란색 셔츠에 초록색 코트지만

코트의 안감, 그리고 코트를 벗으면 드러나는 치마는 붉은계통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의 시작에선 선명한 붉은빛의 드레스로 첫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열흘간 짐짝처럼 갇혀 정형행동까지 보인 순간에도 굳게 지켰을 유골함은 붉은색이며

첫 남편 기도수가 사망 당시 입은 등산복, 그를 살해할 때 서래가 입은 등산복은 공히 붉은색(커플룩?)

그리고 두번째 남편 호신은 바다가 보이는 푸른 풀장을 가득 채운 붉은 핏물 속에 죽어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의 핵심 단서인 월요일 할머니의 케이스도 분홍색 계통이었지요.


 


재밌는 것은 해준의 후배인 수완과 연수의 옷에 갈색,붉은색 포인트가 들어가는 경우들이 보인다는 것인데

수완은 갈색점퍼나 붉은 셔츠를, 연수도 소매부분에 붉은 포인트가 들어간 옷을 입고 나오죠

두 번의 사건에서 언제나 잘못된 결론을 내린 해준과 달리 이들은 바른길을 제기하며 경고한다는 점에서

붉은색 사용의 연장선에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3. 곁가지? 실은 힌트.


 


 


영화엔 '질곡동 살인'이라는 본 플롯과는 큰 관계가 없는 사건이 전반부에 함께 진행됩니다.


 


'범이'라는 인물을 3년전 살해한 두 용의자를 해준은 쫓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지구를 잡지만 그를 통해 진범은 산오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산오가 사귀었던 여성들에 대한 파일에서 서래는 오가인이란 인물을 찍어줍니다.

소년원에서의 트라우마로 감옥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산오이지만 

가인 때문에 폭행을 벌여 1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그 사이 가인을 범한 범이를 죽인 범인이..(박감독의 말장난은 정말...) 산오인 것이죠.


 


그렇게 서래의 도움으로 경기도까지 쫓아가 가인의 미용실에서 찾아낸 산오의 앞에는


가인의 남편으로 짐작되는 인물의 시신이 있고 추격전 끝에  산오는 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자살합니다.


 


그런데 미용실에 있던 가인 남편의 시신을 보여주기 전, 서래에게 설명하는 해준의 입을 빌어

시신에 꼬이는 벌레들의 단계가 설명되는데요 파리가 알을 낳아 구데기가 생기고 그것에 끌린

개미들이 모여들며 마지막에 풍뎅이가 꼬인다고 합니다.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산오가 바라보는 가인 남편의 시신엔 이미 개미와 풍뎅이가 있습니다.

부패 역시 상당히 진행된 듯 보이고요.


 


살인 용의자로 도망중인 그가 사랑하던 여인에게 찾아가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고 

죽은 시신 근처를 멤돌고 있던 것일 까요? 그렇다기에 마지막 산오의 말과 표정이 미묘합니다.

만약 남편을 죽인 것이 가인이라면. 그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산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면?


 


죽기 직전 해준은 산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서래의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며

좋아하는 여자를 때리는 남편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산오의 마지막은 서래의 마지막과 상당 부분이 겹쳐보입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 감독은 슬쩍 관객에게 언질을 한 것일까요?


 


 


먹이를 준 보답으로 고양이가 물어 온 까마귀를 땅에 묻는 서래의 모습 역시

미묘하게 그녀와 해준 사이의 관계가 겹쳐져 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산해경을 옮겨 쓰던 녹색 노트의 내용 중 얼핏 강조되어 보여주는 

羽山이란 글자는 중국의 홍수설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니

동시에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드라마의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서래처럼

영화는 해준과 서래의 이야기를 인용한 듯한 곁가지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그 외의 몇몇가지들


 


 


중국인으로 서쪽에서 온 '서래'와의 대화는 어쩔 수 없이 언어의 벽이 있습니다.

오역과 오해는 이포에 낀 안개처럼 둘의 관계에 한 개의 막을 드리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생기는 안개가 아닐 지도 모릅니다.


 


해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가 말한 것처럼 '꼿꼿한' 느낌으로 문자를 남기는 서래와 달리

호신의 문자는 오타와 틀린 맞춤법의 향연입니다.


 


 


원전 완전 안전하다며 안정을 추구하는 듯 보이는 해준의 아내 정안은 사실 '안 정안'입니다.

그녀의 첫 등장부터 '배우자와 섹스리스인 질투꾼'으로 언급되는 이 주임의 존재는

이후에도 정안이 등장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대화 속에 나오게 됩니다. 

이포로 전근 온 해준의 꼴이 말이 아니라며 남자의 몸에 자라가 좋다고 했다는 이 주임을

저는 내심 '여성동료'라고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미에 해준의 외도를 알아채고서


짐을 싸서 나가는 그녀를 태우러 온 이 주임은 얼마전에 '이혼'했다는 '남성'이었죠.


 


 


서래가 어머니를 안락사 시킬때 사용했다는 펜타닐은 녹색의 연질캡슐에 들어 있습니다.

검색해본 결과 이런 제형으로 나오는 펜타닐은 찾기 힘들었고 사실 영화에 나온 약은

얼마 전까지 제가 챙겨먹던 영양제랑 너무 비슷해서 살짝 섬뜩....


 


서래는 '나를 위해서 네 알'이라며 펜타닐을 가져온 이유를 밝힙니다.


어쩌면 그것은 마지막 바다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 계속 갖고 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해준에게 미결로 남기 위한 과정에서 청석의 모친에게 사용한 듯 보이지요.


때문에 마지막 순간 그녀는 녹색 병에 담긴 술을 대신 마시게 됩니다.


 


이런 연질캡슐 제형은 보존성이 좋고 안정적이며 또한 매우 '소량'의 약을 

효과적으로 섭취하기에 유리하다고 하더군요.

강력한 효과 때문에 적은 양으로도 사망에 이를 수 있어서 알약보다 패치로 많이 나온다는

펜타닐의 성질을 생각한다면 의외로 디테일한 설정일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후반부의 사달이 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사랑한다는 해준의 말'이 담긴 녹음본


서래가 그것을 녹음하는 순간을 영화는 담아냅니다. 대체 왜 녹음을 한 것일까요?


이후 서래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그때까지 서래의 사랑은 시작하지 않았던 거겠지요


해준을 이용해 자신의 결백을 만들어낸 것처럼 이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녹음을 시작하고


그에게 다가가 둘의 관계를 암시하는 말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기도수와 같은 남자만 있었던 그녀의 삶이었기에 이번에도 해준이 자신을 협박하리라 예상하고


안전장치를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자신의 붕괴를 언급하는 그의 고백에 서래의 사랑이 사작되고 말았습니다.


해준이 남기고 간 월요일 할머니의 핸드폰처럼 바닷속에 묻혔어야 할 녹음은 그렇게 남겨진 것이겠습니다.


 



 


첫 남편 기도수가 산에서 마셨을 그의 집에 있던 위스키는 '카발란 올로로소 셰리오크'입니다.

같은 술을 사건해결 후 회식 장소에 해준이 가져가 마시고 있기도 하는데요.


 


부정을 저질러 축재한 공무원 기도수는 남들 눈에 크게 도드라지 않는 부분에서 사치를 부립니다.

롤렉스 시계를 차고 고가의 이어폰을 사용하며 역시 고가일 진공관 앰프로 LP를 듣는 취미가 있죠

위스키 역시 카발란에서도 고가에 속하며 동시에 최근 인기인 쉐리오크에 숙성한 제품을 마신다는

설정을 잡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카발란' 위스키는 대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소품으로 선택된 큰 이유일 겁니다.


 


맥캘란으로 위스키를 처음 배웠던 입장에서 마셔보고 싶은 술입니다만.. 가격이... 구입할 결심을 내리기엔 좀 센 편입니다.